마른 땅의 주인
2019년 10월 26일 토 오전 3:52
땅을 잘못 샀다. 병원에 갔더니 터가 사면에 육지라곤 없는 하천 부지란다. 여기서 오래 사실 거면 당연히 간척을 해야 돼요. 우선 급하니까 물부터 막읍시다. 인제 와 땅을 무를 수도 없고 그나마 얕은 쪽에 둑을 쌓기로 했다. 아침 저녁으로 꼭 밥 먹고 드세요. 처음 복용할 땐 위장장애가 좀 있어요.
17살에 너를 만났다. 함께 노는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둘 다 몰려다니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같은 반이 되었고 네 소개로 같은 수학 과외를 받았다. 과외를 하러 카페에 갈 때면 우리는 커피 대신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아이스 초코를 마셨다. 어스름해질 즘 학교 복도에서 마주치는 날엔 네 자취방 옥상에 올라가서는 이미 해가 진 하늘을 구경하기도 했다. 바깥이 좋은 날엔 가로등 아래 의자에 누웠다. 너는 그때마다 무언가 말을 했다. 내용은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네 목소리 밤하늘 같아.
말하진 못했다. 네 이야길 듣는 밤이 좋았다.
너는 내게 특별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게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못했다. 네가 사랑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게 열이 없어서였다. 사랑은 불 비슷한 성질인데 내 땅이 온통 물뿐이라 불이 머물 데가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을 네게 주고 싶었다.
또 오전 강의에 못 갔다. 으슬으슬하고 몸에 힘이 안 나요. 둑을 쌓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못 쓰는 약이 태반이네요. 용량 맞추기도 까다롭구요. 환자분이 약에 예민한 편이에요. 적합한 자재를 고르다가 공사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공사가 끝나면 불을 피울 수 있는지 물었다. 둑만 쌓으면 저절로 불이 오르고 그런 건 당연히 아녜요. 불을 피우려면 라이타든 부싯돌이든 불내는 것도 필요하구요. 또 지속시키려면은 장작 같은 것도 필요하겠죠. 마른 땅만 있다고 다 되겠어요? 그래도 물이 빠지니까 덜 추울 거예요.
19실 여름이 막 시작하던 때 네가 과외를 그만둔다고 했다. 너는 입시에 싫증이 나 있었다. 확실한 대책 없이 그러지 말아,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면서 너는 뭘 할 작정이냐고 쏘아붙이다 우리는 말다툼을 했다. 너는 울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네가 떠나갈까 봐, 그래서 네가 힘들 때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봐, 무서웠다. 너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어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네 얘기를 해줬다. 10분이 걸렸다. 오늘의 언어를 처음 만나듯, 시인이 시를 옮기듯, 더듬더듬 글자를 가져가서 거칠고 투박한 문장 몇 줄을 얘기했다. 그리고는 투정했다.
「나 너무 말을 못 하는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네 말은 원석 같아. 뒷말을 안 했다.
우리는 같이 밤 운동장을 걸었다. 외곽을 돌고 또 돌았다. 원치 않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네 마음을 채워주고 싶어 이런저런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답하는 너의 목소리는 흐리게 빛나는 별 같았다.
「별 예쁘다. 그치.」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하던 얘기를 이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실은 아주 처음부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얘기를 하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그 말뿐이었다. 네 기분을 살피다가 망설이다가 혀는 자꾸 빙 돌아갔다.
「나도 엄청 외로워. 그런데 다들 자기 자신으로만 살아볼 수 있으니까, 그 삶만 온전히 알 수 있으니까, 아무리 대화를 해도 어느 한구석엔 외로운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 같아…」
네가 작게 끄덕였다.
하고픈 말이 이제 혀끝에 맴돌았다.
그때 네가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서로 완전히 같진 못할 거야.」
너는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맞아.
그런데 우리는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또 완전히 같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할게.
내가 너를 위로할게.」
너는 여전히 땅을 내려보았고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자꾸만 나의 밤하늘이 되고, 흐린 별이 되고, 밤의 땅이 되고, 밤의 소리가 되고…
나는 말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계속 공사 중이었다. 둑을 쌓고, 물을 퍼내고, 다시 망가지고 하며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러는 사이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몇 번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불을 지핀 종이를 건넸고, 나는 물을 담은 병을 건넸다.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교환했다. 다행과 불행의 경계가 마른 진흙처럼 지저분해질 때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온도가 너무 달라.
나는 나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이름이 없는 부류였는지 아니면 미온의 사랑이었는지를 끝까지 정하지 못했다. 한번도 사랑을 알았던 적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그 생경한 밤은 잊을 수가 없었다.
네게 카톡이 왔다.
「뭐해?」
「자체공강 했어…」
「나 지금 학교가는 중인데 너희 집으로 갈까?」
날도 좋은데 밖에 구경이나 가자고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결국 내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방학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안부를 얘기했다. 너는 아직 진로를 못 정했다고 했다.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도 얘기했다. 꼭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요즘엔 관계가 쉽더라. 너는 외로워했다.
「난 요즘 카톡 잘 안 들어가. 뭔가 소모적인 관계가 쌓여 있는 거 같아. 그래서 친구 목록도 다 정리했어. 정말 별로 안 남더라.
「그래.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저번에 한 번 탈퇴했는데 아마 또 하게 될 거 같아.」 너는 우울해 보였다.
그래도 힘이 부치면 날 찾아와, 말 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에게 아무 책임이 없었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내가 말했다.
「나 사실 행복 같은 거 잘 못 느낀다? 설렘이나 사랑 그런 것도.」
「응. 맞아. 너 고등학교 때 그래 보였어.」
「그럼 뭐 비밀도 아니었네. 근데 그 날 있잖아. 작년에 네가 내 자취방 왔는데 집이 완전 엉망진창이었을 때. 나 학교 간 사이에 네가 집 다 치우고 편지 하나 두고 갔잖아. 나 그거 읽고 엄청 울었다? 나 잘 못 지냈는데 네가 나보고 잘 지내고 있으라고 했어. 꼭 아는 것처럼.」
너는 말을 고르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너도 잘 지내고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박이었다.
끼니 잘 챙겨 먹죠? 햇볕도 쬐고? 운동도 하고 있어요? 잠도 충분히 자구요? 좋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경 쓰셔야 돼요. 잠은 몇 시에 자요? 아휴, 그러면 안 되는데… 건강한 게 제일 중요하다니까요. 그래도 물 적당히 빠졌죠? 조만간 매립도 할 수 있겠네요.
좀처럼 다음으로 넘어가질 않던 내 삶에 하얗게 각질이 일었다. 도시에는 가을이 왔다. 아직은 나뭇잎 가장자리에도 단풍이 물들지 않았고, 코스모스만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평범한 초가을이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어떤 예감도, 기별도 없이 마음에 불씨가 생겼다. 공원에 불 꺼진 천막이 죽 늘어서 있었다. 곧 가을 축제를 한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밤 공원을 달렸다. 가로등, 건물의 빛, 신호등, 자동차 헤드라이트, 달, 별. 울렁이지 않는 밤의 불빛이 물을 걷어낸 땅에 드리웠다.
얼마 뒤 네게 연락이 왔다. 네가 카톡을 삭제한 채로 몇 달을 지내다 돌아와 처음 보낸 말이었다. 꼭 새로 만난 사이처럼, 긴 화면에는 카톡 한 줄이 덩그러니 있었다.
「자른 머리가 잘 어울려.」
네 말이 마른 땅을 데웠다. 목구멍이 화끈거리다 울컥 말이 목에 걸렸다.
너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어.
나는 그 마음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어.
「고마워. 시집 언제 돌려줄까?」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